선덜랜드 AFC

 



[image]
<colbgcolor=#eb172b> '''선덜랜드 AFC'''
'''Sunderland A.F.C.[1]'''
'''정식 명칭'''
Sunderland Association Football Club
'''별칭'''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s)'''
'''The Mackems'''[2]
'''Red & White Army'''
'''창단'''
1879년
'''소속 리그'''
EFL 리그 원 (EFL League One)
'''연고지'''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타인위어선덜랜드 (Sunderland)
'''홈 구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Stadium of Light)
(49,000명 수용)[3]
'''라이벌'''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 '''위어타인 더비'''[4]
'''미들즈브러 FC''' - '''위어티스 더비'''[5]
'''구단주'''
키릴 루이-드레퓌스[6]
'''감독'''
리 존슨 (Lee Johnson)
'''주장'''
그랜트 리드비터 (Grant Leadbitter)
'''역대 한국인 선수'''
지동원 (2011~2014)
기성용 (2013~2014 / 임대)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우승 기록'''
'''프리미어 리그 (1부)'''
(6회)
1891-92, 1892-93, 1894-95, 1901-02, 1912-13, 1935-36
'''EFL 챔피언십 (2부)'''
(5회)
1975-76, 1995-96, 1998-99, 2004-05, 2006-07
'''EFL 리그 1 (3부)'''
(1회)
1987-88
'''FA 컵'''
(2회)
1936-37, 1972-73
'''FA 커뮤니티 실드'''
(1회)
1936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디디에 은동 (Didier Ndong)
(2016년, From FC 로리앙, 180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조던 픽포드 (Jordan Pickford)
(2017년, To 에버튼 FC, 2565만 £)
'''최다 출장'''
지미 몽고메리 (Jimmy Montgomery) - 627경기 (1960-1977)
'''최다 득점'''
바비 거니 (Bobby Gurney) - 228골 (1925-1950)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8회)
존 캠벨 (1891-92, 1892-93, 1894-95)
조지 홀리 (1911-12)
찰리 버컨 (1922-23)
데이브 할리데이 (1928-29)
디키 데이비스 (1949-50)
케빈 필립스 (1999-2000)

1. 개요
2. 상세
3. 상징
3.1. 검은 고양이
4. 역사
4.1. 영광의 초창기 시절(1879~1957)
4.2. 재정위기와 흔들리는 위상, 그와중의 두번째 FA컵 우승(1957~1987)
4.3. 밥 머레이 시대와 신구장으로의 이전(1987~2006)
4.4. 나이얼 퀸과 엘리스 쇼트 시절(2006~2016)
4.5. 충격의 백투백 강등과 새로운 시작(2016~)
5. 라이벌
6. 팬 성향
7. 죽어도 선덜랜드(Sunderland 'til I die)
8. 이야깃거리
8.1. 기타
9. 레전드
10. 시설
11. 1군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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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스널에서 내 트레이드를 배웠고 맨체스터 시티에서 축구선수가 되었지만 선덜랜드는 내 몸 안에 있다. 난 선덜랜드를 사랑한다.[7]

- 선덜랜드의 前 선수, 감독, 회장이었던 나이얼 퀸


1. 개요



1879년에 창단된 선덜랜드를 연고지로 하는 잉글랜드 프로 축구 클럽. 홈구장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2. 상세


1부 리그 우승만 6번[8]을 한 화려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클럽이며 이런 명성은 스페인의 아틀레틱 클루브와 일제시대 한국의 보성전문학교 축구팀의 유니폼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 1부 리그 우승이 1936년일 정도로 오래되었다.
지명이자 클럽명인 Sunderland의 어원은 asunder(갈라진, 떨어진)에서 왔다. a가 빠지고 sunder만 남아 sunder land가 된 것. 우리말로 하면 갈라진 땅이라 하면 되겠다.
2018-19시즌 현재 EFL 리그 1 소속팀이자 EFL 리그 1에서 가장 큰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는 팀이다.[9]

3.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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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로 1977년까지 썼던 엠블럼, 1977~1997년까지 썼던 엠블럼,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쓰고 있는 엠블럼
  • 선덜랜드 현 엠블럼은 1997년 7월 홈 경기장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개장과 함께 공개됐다. 엠블럼 방패 위 쪽에는 탄광에서 쓰는 바퀴가 올라가 있다. 선덜랜드 시 인근은 역사적으로 광산업이 유명했었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도 몽크위어마우스 탄광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 엠블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방패는 4등분 돼 있는데, 좌측 하단과 우측 상단에는 선덜랜드의 상징적인 색상이자 유니폼 색인 흰색과 빨간색의 줄무늬가 들어가 있다. 아틀레틱 클루브고려대학교 축구부 유니폼 무늬도 선덜랜드의 유니폼에서 따왔는데, 특히 고려대 축구부는 보성전문학교 때부터 써왔다.
  • 엠블럼의 우측 하단 다리는 선덜랜드 중심에 흐르는 위어 강을 가로지르는 위어마우스 다리를 상징하고, 좌측 상단의 건물은 선덜랜드에 있는 펜쇼 모뉴먼트를 나타낸다.

3.1. 검은 고양이


[image]
[image]
선덜랜드의 별명은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s).
과거에는 엠블럼에 검은 고양이 그림이 들어간 적도 있었다.
홈 경기장 벽에 검은 고양이가 걸어오는 듯한 그림이 걸려있다.
[image]

4. 역사





선덜랜드의 풋볼리그 참가 100년을 맞이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비디오(1990)

4.1. 영광의 초창기 시절(1879~1957)


1879년에 선덜랜드에서 근무하던 교사 제임스 앨런과 그를 따르는 교사들에 의해 '선덜랜드 지역 교사 축구팀(Sunderland and District Teachers A.F.C)'이라는 이름으로 창설, 1881년부터 현재의 '선덜랜드 AFC'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일반인도 가입 자격을 부여하였고 1890-91 시즌부터 풋볼 리그에 참가하였다. 이후 풋볼 리그에서 1891-92, 1892-93, 1894-95, 1901-02, 1912-13, 1935-36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1937년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명문으로 손꼽혔다. 밥 카일이 1905년 8월부터 1928년 5월까지 약 23년간 감독으로 있었는데 이것이 2019년 현재까지도 선덜랜드의 최장기간 감독직이다.

4.2. 재정위기와 흔들리는 위상, 그와중의 두번째 FA컵 우승(1957~1987)


1957년에 선수들에게 규정보다 더 많은 임금을 준 것이 들통나 5천 파운드[10]의 벌금을 선고 받고 회장과 3명의 이사가 해임당했는데 이런 타격으로 1958년에는 클럽이 1890년부터 풋볼리그에 참가한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된 후 1~2부 리그를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1973년에 FA컵 우승을 하고 1985년 리그컵 준우승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1986-87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3부 리그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특히 1973년 FA컵 결승전은 당시 2부 리그였던 선덜랜드가 1부 리그에서도 잘나가고 있던 리즈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우승한 경기로 선덜랜드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날 결승골의 주인공이 선덜랜드의 레전드이자 후에 부산 아이파크에서 감독도 했었던 이안 포터필드다.

4.3. 밥 머레이 시대와 신구장으로의 이전(1987~2006)


1987년 3부로의 강등 이후 새 구단주인 밥 머레이 경의 체제하에 1987-88시즌에 3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바로 승격에 성공하였으며 1990년에는 1부 리그로까지 승격하였다. 다음 시즌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으나 1992년 FA컵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1995년에 피터 리드가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1995-96시즌에 2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다시 프리미어 리그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1996-97시즌에 최종전 윔블던 원정에서 18위였던 코번트리 시티에 업셋을 당하며 아쉽게 18위로 2부로 강등되었다. 1997년에 99년간 홈구장이었던 로커 파크를 떠나 새 구장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로 이전했다. 1997-98 시즌 2부리그에서 간발의 차이로 3위를 기록한 뒤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꺾고 올라간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찰튼 애슬레틱을 만나 4:4 혈투 끝에 승부차기로 패해 아쉽게 승격이 좌절되었으나 1998-99시즌 2위 브래드포드와 승점 18점차인 31승12무3패 승점 105점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우고 2부 리그 우승을 하며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하였다.
1999-2000시즌 승격하자마자 프리미어 리그에서 시즌 중반에는 2위와 3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며 7위를 기록했는데 케빈 필립스나이얼 퀸과 환상적인 빅앤스몰 투톱을 구성하며[11] 30골로 EPL 득점왕에 오름과 동시에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였다. 2000-01시즌에도 중반기 2위까지 올라갔으나 페이스가 급락하며 전 시즌에 이어 7위에 올랐다. 그러나 2001-02시즌에 리그 최소 득점인 29득점만 기록하는 극심한 골가뭄 속에 17위로 내려앉은 뒤 2002-03 시즌에는 이적시장 데드라인에 패닉바이로 나이얼 퀸의 대체자를 마련하기 위해 노르웨이 대표팀의 공격수 토레 안드레 플로를 클럽 레코드로 영입했지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4승7무27패, 21득점 65실점에 승점 19점[12]이라는 처참한 성적[13]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이 과정에서 7년 간 선덜랜드를 이끌던 피터 리드와 그 후임이었던 하워드 윌킨슨[14] 감독이 경질되었고,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이던 믹 맥카시가 2003년 3월에 선덜랜드에 부임하였다. 2003-04시즌 2부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6위를 차지한 크리스탈 팰리스[15]에게 플레이오프에서 져 승격이 좌절되었지만 2004-05시즌 EFL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2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2005-06시즌 3년 전 기록했던 프리미어 리그 최소승점 기록을 다시 경신하며 3승6무29패라는 처참한 결과를 안은채[16][17]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4.4. 나이얼 퀸과 엘리스 쇼트 시절(2006~2016)


20년간 팀을 운영해 온 밥 머레이 경은 구단주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전 선덜랜드 선수였던 나이얼 퀸이 2006년에 구단을 인수한 후 클럽의 회장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퀸은 2부 리그에서 개막 후 4경기를 모두 패한 뒤 자신에게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고 얼마 전 은퇴한 맨유의 전 캡틴이던 로이 킨에게 감독 자리를 맡겼다. 사실 선수 시절 로이 킨과 나이얼 퀸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덜랜드에서는 퀸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감독을 도왔고 로이 킨은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2006-07 시즌 17경기 연속 무패를 이어가는 등 화려한 성적을 보이며 EFL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하고 팀을 승격시키며 선덜랜드는 프리미어 리그로의 복귀에 성공했다. 2007-08 시즌 15위로 프리미어 리그 잔류에 성공했으나 2008-09 시즌 성적 부진으로 로이 킨은 사임했다. 2009년에 엘리스 쇼트가 구단을 사들여 새 구단주가 되었다. 리키 스브라지아가 잠시 팀을 이끌며 16위로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시킨 뒤 2009-10 시즌 스티브 브루스가 부임하였다. 그 후로도 비록 중하위권이지만 계속해서 프리미어 리그에서 끈질기게 버티는데 성공하여 2016-17 시즌까지 줄곧 프리미어 리그에 있었다.

4.5. 충격의 백투백 강등과 새로운 시작(2016~)


2007-08 시즌부터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해 2016-17 시즌까지 10 시즌을 연속해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다가 2016-17 시즌과 2017-18 시즌 충격의 백투백 강등을 경험하며 3부 리그까지 떨어졌다. 2016-17 시즌 2부 강등 이후 구단주인 엘리스 쇼트는 클럽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고 악조건 속에 2017-18 시즌에 다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또다시 강등되었으며 그 과정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에 잘 나와있다. 2017-18 시즌이 끝난 이후 엘리스 쇼트는 구단을 팔았고 스튜어트 도널드가 새 구단주가 되어 클럽을 재정비하며 부활을 노리고 있지만 2시즌 연속으로 승격에 실패하며 2020년 7월 20일에 승격 실패와 더불어 코로나 쇼크로 인한 재정적 부담으로 클럽 회장직을 사임하고 2020년 12월에 클럽에 대한 지분 74%를 키릴 루이-드레퓌스에게 매각한다.

4.6. 역대 시즌




5. 라이벌



5.1. 뉴캐슬 유나이티드 - 위어타인 더비


'''vs'''
'''선덜랜드 AFC
Sunderland A.F.C.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Newcastle United F.C.
'''

북동부의 가장 큰 라이벌인 선덜랜드와 뉴캐슬 간의 더비 매치.
자세한 내용은 위어타인 더비

5.2. 미들즈브러 FC - 위어티스 더비


'''vs'''
[image]
'''선덜랜드 AFC
Sunderland A.F.C.
'''

'''미들즈브러 FC
Middlesbrough F.C.
'''

위어타인 더비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위어티스 더비

6. 팬 성향


축구해설가 서형욱이 2005년에 낸 저서 <유럽축구여행>에 따르면, 팬들은 미래를 내다보기보단 옛 영광에 천착하는 과거지향적인 모습만을 보인다고 한다. 연고지 내 펍(술집) 내부를 둘러봐도 1973년 FA컵 우승 당시 사진이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분위기를 내포한다.

7. 죽어도 선덜랜드(Sunderland 'til I die)



유명 스트리밍 사이트 넷플릭스에 총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2013년에 맨유의 레전드들을 다룬 작품인 'Class of 92'[18]를 촬영하는 등 능력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TV 프로그램 제작회사인 Fulwell 73이 제작을 맡았다. 왜 하고많은 클럽들을 제쳐두고 선덜랜드를 골랐냐면, Fulwell 73의 설립자 4명 중 3명이 선덜랜드의 열렬한 서포터[19]로, 회사 사명인 Fulwell 73에서 Fulwell은 선덜랜드의 옛 경기장인 로커 파크의 스탠드명이며 73은 선덜랜드의 유일한 FA컵 우승 시즌인 1973년을 의미한다. 회사 사명을 이렇게 지을 정도였으니 선덜랜드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추측해볼 수 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것은 2018-19시즌이 진행 중인 2018년 12월 14일이었지만, 촬영 시점은 챔피언쉽으로 강등된 첫번째 시즌인 2017-18시즌[20]이었다. Fulwell 73은 선덜랜드가 2부 리그로 강등된 다음 시즌에 EPL로 복귀하려는 도전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는데, 자신의 투자를 줄이는 대신에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고 싶었던 당시 선덜랜드 구단주인 엘리스 쇼트의 의도와 부합하면서 다큐멘터리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재정적으로 방만한 운영을 거듭해온 선덜랜드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승격 도전은 커녕 '''오히려 3부 리그로 2년 연속 강등 당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다른 의미로 역대급 축구 다큐가 되었다.''' 이러다보니 응원하는 팀의 승격 도전기를 찍고 싶어했던 제작사와 선덜랜드의 서포터들은 팀이 처참하게 강등당하는 것을 보며 멘탈이 가루가 되었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재정적인 투자를 받고자 했던 구단주 엘리스 쇼트는 투자는 커녕 시즌1 에피소드 내내 서포터들에게 온갖 욕을 다 먹으며 조리돌림 당했고, 결국 리그 1으로 강등되자 팀을 팔기에 이르렀다.
선덜랜드의 열렬한 서포터들이 찍은 다큐멘터리라서 그런지 "유벤투스:살아있는 전설"이나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우승 시즌을 찍은 "All or nothing"같은 이전의 다큐멘터리들과는 다르게 선수나 감독들보다는 클럽을 떠받치는 지역 커뮤니티에 초점을 맞춰서 커뮤니티에 속해있는 서포터들과 클럽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시즌 동안 비틀거리는 클럽의 각종 내부사정과 사건사고들도 보여주어 훨씬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라는 호평을 받았다.
홍보효과도 상당했는데 그 동안 이름만 알았지 선덜랜드 팀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던 축구팬들도 '선덜랜드의 경기장이 저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현지팬들은 대단하다', '보드진 꼬라지가 우리 팀 보는거 같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선덜랜드라는 팀에 흥미를 보여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넷플릭스에서 방송이 되었던지라 축구에 관심없던 사람들도 시청하면서 선덜랜드라는 팀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다큐 공개 이후 1달 정도만에 미국에서 약 250~300여명이 선덜랜드 서포터에 가입했다는 말도 있다.
연고지의 팬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2부리그에 속해있던 17-18시즌의 평균관중수가 2만7천여명을 기록한 반면에 3부리그에 속한 18-19시즌의 평균관중수는 3만명 이상을 기록했다. 3부리그에서 성적이 더 좋아서 늘어난 것도 있기는 하지만 하부리그로 갈수록 원정팬의 입장객 숫자가 훨씬 줄어드는것을 감안한다면 홈 관중의 수는 훨씬 많이 늘어난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인트로 영상도 호평을 받았으며 배경음악으로 쓰인 The Lake Poets의 노래인 Shipyards[21]는 다큐 공개 이후 아이튠즈 UK싱글차트 4위까지 오르기도 했으며 12월 26일 박싱데이 땐 경기 시작 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직접 노래도 불렀다. The Lake Poets가 선덜랜드 출신의 가수이기도 하고 곡 자체도 메인 멤버인 마틴 롱스태프가 선덜랜드에서 평생 조선소에서 일했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만든 곡이기 때문에 리버풀 FC의 You'll never walk alone처럼 앞으로 선덜랜드 AFC의 비공식 주제곡처럼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22]
방영 확정은 아니지만 시즌 2를 염두해서 3부 리그에 있는 2018-19 시즌에도 촬영을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4월 1일, 시즌 2가 공개되었다. 18-19 시즌 EFL 리그 1에서 승격을 위해 분투하는 새로운 구단주 스튜어트 도널드[23] [24] 와 휘하 경영진들, 그리고 새로 임명된 잭 로스 감독이 이끄는 새로운 선덜랜드 선수단의 모습을 그려냈다. 1화 개막전부터 찰턴을 상대로 극적인 라스트 미닛 골을 넣고 승리하며 산뜻한 시즌 출발을 알리는 듯 했으나, 반 시즌 동안 무려 16골을 기록하던 주전 공격수 조시 마자[25]의 겨울 이적시장 통수 이적으로 주포를 잃고, 각고의 노력 끝에 올라간 체커트레이드 컵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석패하는 등 온갖 고난을 당하는 선덜랜드 팀과 팬들의 모습이 나왔다. 결국 위태위태하던 경기력과 주전 선수들의 부상 악재 속에 승강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개막전 상대였던 찰턴에게 라스트 미닛 골을 먹고 승강에 실패하며 다음 시즌도 또 3부리그에서 보내게 되었다. 마지막화에서 애써 울음을 삼키는 구단 소속원들의 모습과 팬들의 눈물이 인상깊게 연출되었다.

8. 이야깃거리


  • 연고지 도시 인구 대비 관중 수가 매우 큰 클럽으로 프리미어 리그에 있던 2007~2017년에는 매 시즌 평균 관중이 4만명이 넘었고 3부 리그에 있는 2018-19 시즌에도 평균 관중 수가 3만명이 넘는다. 2018년 12월 26일 박싱데이 때는 46,039명이 몰려와 리그1 역사상 최대 관중 수를 기록했다.
  • 전통적 라이벌로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있다. 선덜랜드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대결은 위어타인 더비(Wear-Tyne derby)라 불린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약 20km 밖에 되지 않는다. 선덜랜드와 마찬가지로 뉴캐슬 유나이티드도 연고지 사람들에게 열정을 많이 받는 클럽이다.
  • 리그 최다 득점차 승리는 1908년 12월 5일에 한 9:1 승리인데 재밌게도 상대가 영혼의 라이벌인 뉴캐슬이었다.
  • 이 클럽 레전드인 나이얼 퀸2002 한일 월드컵아일랜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은퇴 후 선덜랜드를 인수하고 회장을 맡던 시절인 2007년 4월 카디프 시티와의 원정경기에서 공항에 발이 묶인 100여명의 선덜랜드 팬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무려 8천 파운드(약 1천 500만원)에 달하는 택시비를 대신 내주어 화제를 모았다.
  • 영국 유학 시절에 선덜랜드 팬이었던[26] 축구 전문 언론인 서형욱이 2000년 초반에 당시 2부 리그였던 선덜랜드 경기를 직접 가 봤는데 2만이 넘는 평균 관중이 꼬박꼬박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서형욱 회고에 의하면 선덜랜드 서포터들이 외국인 그것도 이 근처에서 드문 동아시아인이 선덜랜드 유니폼 입고 선덜랜드 서포터들이 주로 가는 펍으로 들어와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과 서포터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다. 1970,80년대에 선덜랜드의 조선업 종사자들이 로테르담으로 많이 건너가면서 생긴 관계이다.
  • 선덜랜드 AFC Ladies라는 여자 축구팀도 운영하고 있다.
  • 전설의 리중딱 드립은 이 팀의 거스 포옛 전 감독에 의해 탄생했다. 항목 참고.

8.1. 기타


대한민국에서는 선덜랜드, 선더랜드 말고도 번개땅(...)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실제 영문표기는 Sunderland다. 만약 진짜 이름이 Thunderland라고해도 틀린 표현이다. Thunder는 천둥이기 때문에 천둥땅이라고 불려야되는게 옳은 표현이다. 이름이 번개땅이 될려면 Lightningland(...) 라이트닝랜드가 되어야 된다. 천둥과 번개는 헷갈려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으나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중반에 맨유 출신의 감독과 선수가 선덜랜드에 온 경우들이 일부 있었고 맨유의 라이벌 팀들은 신들린듯이 때려잡으면서도 그 시기에 한동안 맨유는 이긴적이 없어서 국내 한정으로 맨유 2중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대부분의 해축 팬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처음 해축을 접하기 시작했던데다가 대부분의 인기가 맨유 같은 일부 빅클럽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걸 그 중심의 관점으로 바라보다보니 우연히 타이밍이 겹쳐서 생긴 한국에서만의 인식일 뿐이다.
한국 선수 중에는 지동원을 2011년 영입하였지만 지동원은 별다른 활약을 못하고 대부분 벤치만 지키다가 2014년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적했다. 스완지 시티에 있던 기성용이 2013-14시즌에 임대로 와서 큰 활약을 하였다.
2009년 10월 16일 리버풀 FC와의 경기에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비치볼 사건. 선덜랜드의 공격수 대런 벤트가 날린 슈팅이 리버풀 골문 앞에 있던 빨간색 비치볼에 맞고 굴절, 그대로 골문 안으로 들어간 것. 경기 도중 한 어린아이가 던진 비치볼에 슛이 굴절이 되어 들어갔는데 이것이 득점으로 인정되었고 선덜랜드가 1-0으로 승리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골로 화제가 됐다. 이 비치볼은 411.77(한화 약 72만원!)에 낙찰돼 지금은 국립 축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사. 규정에 따르면 비치볼이 들어온 즉시 경기가 중단되었어야 하는데 그대로 진행되고 득점까지도 인정되었다. 결국 리버풀은 1-0으로 패배하고 그 후 7경기동안 1승 3무 3패를 기록하며 비치볼의 저주를 맛봐야했다. 이 사건은 국내에서는 일명 "풍선골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리버풀의 예능풀 이미지와 페페 레이나의 예능 키퍼 이미지에 이 사건이 한몫 하기도.



9. 레전드



10. 시설


  • 홈구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Stadium of Light). 북동부 지역의 광산업 헤리티지를 반영하고 이 지역에서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며 일했던 사람들을 기리는 뜻에서 밥 머레이 경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of Light"라는 표현은 선덜랜드 AFC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어 유스 아카데미와 훈련장, 자선 기금 등 클럽과 관계된 많은 시설과 기관들의 이름에도 이 표현이 사용된다.
  • 유소년 아카데미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Academy of Light). 선덜랜드의 유소년 아카데미는 가장 높은 등급인 Category 1(Elite) 등급을 받은 아카데미다. 이곳 출신 유명선수로는 조던 헨더슨, 조던 픽포드 등이 있다.

11. 1군 스쿼드




[1] /ˈsʌndərlənd/[2] Mackem은 선덜랜드 지역, 선덜랜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3] 1997년 개장 당시 42,000석 규모로 당시로서는 2차 대전 이후 지어진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스타디움이었으며 2000년에 49,000석까지 확장되었다. 2019년 현재도 잉글랜드에서 8번째로 큰 축구구장이다.[4] 선덜랜드와 뉴캐슬은 잉글랜드 북동부에 함께 위치한 라이벌이다. 양 팀 사이의 더비를 두 도시에 흐르는 강(위어 강, 타인 강) 이름을 따서 위어타인 더비, 타인위어 더비라 부른다. 선덜랜드와 뉴캐슬어폰타인은 도시간 근 천 년을 헤아리는 대립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 위어타인 더비도 북동부 3대 더비 중 가장 치열하다.[5] 미들즈브러도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북동부에 위치해 있고 선덜랜드와 라이벌 감정이 심하다. 두 도시에 흐르는 강(위어 강, 티스 강) 이름을 따 티스위어 더비라 부른다. 위어타인 더비 보다는 라이벌 감정이 덜 심하다.[6] 1997년 12월 18일 출생. 인수 당시 나이가 만 23살로 잉글랜드 프로축구 클럽을 통틀어 역대 최연소 구단주이다.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전 구단주였던 마르가리타 루이-드레퓌스의 아들로 축구에 관심이 적은 어머니와는 다르게 축구광이라고 한다.[7] I learned my trade at Arsenal, became a footballer at Manchester City, but Sunderland got under my skin. I love Sunderland.[8] 잉글랜드를 통틀어 선덜랜드보다 1부 우승을 많이 한 클럽은 2019년 현재 다섯 클럽 밖에 없다[9] 18-19시즌 기준 3부 리그에서 유일무이하게 4만석 이상 경기장이다.[10] 현재의 시세로는 9만 파운드(약 1억 5천만원)[11] 나이얼 퀸과 케빈 필립스 사이에 신장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저런 별명이 붙었다. 나이얼 퀸은 리그에서 18골을 득점하였다.[12] 당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소 승점 기록이었다.[13] 안습인 점은 전반기 마감 무렵 리버풀을 잡을때 4승5무9패였지만 그 다음 경기부터 20경기 동안 2무18패라는 안습의 성적을 냈다. 그리고 23라운드 블랙번과 0:0으로 비긴 뒤 나머지 15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이 프리미어리그 연패 기록은 2005-06 시즌 승격 후 개막 5연패하며 20연패가 되었다. 리그 최다골 선수도 6골을 넣은 케빈 필립스였다. 클럽 레코드 플로는 4골로 먹튀.[14] 리즈 유나이티드의 1부 리그 마지막 우승을 이끈 감독이다.[15] 크리스탈 팰리스가 그 시즌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16] 심지어 첫 홈 승리가 마지막 홈경기였다. 희생양은 풀럼. 이거조차 굉장히 운이 좋았던 이유는 33라운드 경기로 당초 2006년 4월 8일에 열렸으나 풀럼의 맥브라이드 골로 풀럼이 앞선 상태에서 엄청난 폭설이 쏟아져 노게임선언되고 5월 4일에 처음부터 리셋돼서 다시 열린 경기였다. 정상대로 진행되었다면 역대 초유의 한 시즌 프리미어리그 홈무승팀이 나올 뻔 했다. 선덜랜드의 3승을 책임져 준 팀은 도깨비팀 미들즈브러, WBA, 풀럼이었다. 여담으로 당시 우승팀 첼시를 열심히 추격하던 맨유는 시즌 막판 홈에서 선덜랜드와 0-0으로 어이없게 비기며 우승도전이 사실상 날아갔다.[17] 이 최소 승점 기록은 2년 뒤 더비 카운티가 승점 11점으로 경신했다.[18] 영국 스포츠 다큐멘터리 최고 판매 기록을 세운 바 있다.[19] Fulwell 73의 설립자 4명은 게이브 터너, 벤 터너, 레오 펄만, 벤 윈스턴으로 이들 중 유일하게 벤 윈스턴은 아스날의 서포터이다. 웃긴 것은 선덜랜드 서포터지만 선덜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터너 형제는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부모님이 선덜랜드의 오랜 서포터였기에 자연스레 선덜랜드 서포터로 자랐으며, 터너 형제의 친척인 레오 펄만은 한술 더 떠서 뉴캐슬 태생이지만 선덜랜드의 팬이다.[20]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7년 6월에 Fulwell 73의 공동 창립자인 선덜랜드 서포터 3명이 컨소시엄을 이끌어서 선덜랜드 인수를 시도했으나 후원자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발을 뺐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에 대해 제작자들은 홍보를 위한 라디오 출연에서 이를 부인한 바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21] 다큐 때문에 만든 곡은 아니고 이들의 과거 데뷔앨범에 있는 곡이다.[22] 선덜랜드 자체가 과거 조선업과 탄광업으로 유명했던 도시였지만 영국 조선업의 몰락과 함께 선덜랜드도 몰락해버린 역사가 있다.[23] 시즌1 영상 내내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비추던 이전 구단주와 다르게 시즌2 내내 주인공급으로 등장하며 필사적으로 구단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부 재무상태를 개선하고, 주전 선수에게 애정을 드러내고 직접 이적 시장을 총괄하거나, 구단을 그만 파는게 어떠냐는 아내의 말에 선덜랜드를 유지하고 싶다고 대답하는 등 상당한 개념 구단주로 나온다. [24] 다만 그와 같은 장면들은 연출된 가능성이 높은 것이, 지속적으로 팀을 열심히 경영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였고, 구단의 성적에 대해 불만하는 팬들과 등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7월 20일에 대표직에서 사임하였다.[25] 지롱댕 보르도로 이적해서 황의조와 동료가 되었다.[26]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선덜랜드의 행보와 경기력에 대해 후한 평을 내리는 경향이 있는 한편 뉴캐슬에 대한 평가는 꽤나 박하다.